휴가를 앞두고 이 소설을 샀다. ‘일은 소설에 맡기고 휴가를 떠나요’라는 제목이 나를 이끌었다. 어차피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휴가는 포기하였고, 아내와 나는 빈둥빈둥 맛있는 것이나 먹으러 다니면서 한 이틀 소일하자 하였으니, 그때 옆구리에 끼고
다니기에 적당하다 여겼다. 하지만 웬걸 칠백 오십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끼고 다닐 재간은 없었고, 휴가 기간 내내 책은 거실에서
자동차로, 다시 자동차에서 침실로, 침실에서 자동차로, 다시 자동차에서 책상으로 옮겨 다니기만 하였다.
책에 실린 서른 두 명의 작가들 중 반가운 이름들이 있었던 것도 이 책을 집어든 이유가 되었다. 줌파 라히리, 앨리스 먼로,
조이스 캐럴 오츠는 그렇게 반가왔다. 얼핏 들어본 이름들 혹은 몇 편의 단편을 본 작가들도 더러 있었다. 러셀 뱅크스, 존 치버, 주노 디아스,
애니 프루, 제임스 설터 등이 그랬다. 나머지 작가들, 이 책의 기획자인 리처드 포드를 비롯하여 도널드 바셀미, 리처드 바우시, 앤 비티, 톰
코라게선 보일 등의 작가들은 한 번도 접하지 않은 작가여서 또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일의 건전한 힘이 나에게 강요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 때문에, 내가 등장인물을 이리저리 짜맞추어 장편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중요한 등장인물이 먹고 살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지 확실하게 말하지 않으면 내가 그 인물에게 주려고 했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인물이 도덕적인 무게를 지니고 기승전결을 원만하게 이어가서 독자를 열중하게 만들려면, 또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가 훌륭한 등장인물의 조건으로
제시했듯이 ‘우수리가 없이 딱 맞는’ 인물이 되게 하려면 나에게서 우선 그 인물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설득력이 있어야 했다... 내가
독자의 입장에서 읽었을 뿐인 가공의 인물들, 즉 다른 작가의 작품과 비판에서 내 머릿속에 살아있는 인간으로 자리 잡으려고 애쓰는 힘없는 작은
인물들에서도 일은 대단한 힘을 발휘했고, 허구를 현실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폭발력을 띠었으며, (지금도 그렇지만) 등장인물들에게 현실감을
더해주는 필수조건이었다...” (p.12)
하지만 리처드 포드의 서문에 실린 위와 같은 문구를 보고 난 다음에는 보다 나은 독서의 이유가 생겼다. 사실 나는 우리나라
소설에서 그저 희미하게만 드러나는 일이나 직업에 대해 나름의 불만을 가지고 있는데, 서문에 실린 리처드 포드의 글이 내 불만의 정체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소설이 애초에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고, 우리들 대부분은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나라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그렇게 변변찮은 일조차 하고 있지 않기 일쑤인가,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등단을 하고 소설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친구를 만나면 이렇게 퉁박을 주고는 했다.
거 만날 끼리끼리 글 쓰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만 해서 무슨 글을 쓰겠냐. 그러니까 우리나라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만날 글이나 쓰고
있거나, 다른 사람 가르치는 일이나 하고 있는 거 아니냐. 그러니 만날 허공에 떠 있는 듯 정체불명의 인물이거나 실업자이거나 학교 언저리를
떠돌아다니는 반룸펜이거나 하지 않느냐. 영화판에서야 홍상수 혼자 그걸 써먹고 있으니 덜 욕먹지만, 소설판에서는 어째 죄다 홍상수냐. 그러니 너도
만날 글 쓰는 친구들 말고 이런저런 직업군의 친구를 사귀고 만나라. 난 좀 더 재밌고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는 소설을 읽고 싶단 말이다.
뭐 대충 이런 식의 퉁박이었고, 물론 착하디착한 그 친구는 그저 고개나 주억거리면서 가타부타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글 쓰는
일로는 먹고 살기가 애당초 불가능하여 이런저런 일로 글 쓸 시간을 근근이 벌고 있는 친구에게는 가당찮은 훈수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거기서
퉁박을 더 늘이는 불찰은 없었으나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속사정 탓에 좀 더 정독으로 소설집의 단편 소설들을 읽었다.
그렇게 소설들을 읽은 결론은? 뭐 말끔하지는 않다. 우리 소설의 인물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는 내 불만을
해소시켜 주지는 않았다. 일 하는 사람들 혹은 일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작가들의 소설 속
구직란을 달래줄 어떤 소설 작법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저 우리에게도 이런 기획 하나쯤 필요하지 않나, 여기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찜찜한
상태로 읽은 서른 두 편 소설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맥스 애플 「사업이야기」, 러셀 뱅크스 「걸리」, 도널드 바셀미 「나와 맨디블 양」, 리처드 바우시 「부당한 일」, 앤 비티
「일하는 여자」, 톰 코라게선 보일 「자파토스」, 조지 챔버스 「(내 아버지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존 치버
「사과의 세상」, 찰스 담브로시오 「드러먼드와 아들」, 니컬라스 델반코 「작가들이 하는 일」, 주노 디아스 「뉴저지, 에디슨」, 안드레 더뷰스
「배달」, 스튜어트 다이벡 「사워크라우트 수프」, 데바로 아이젠버그 「설계의 결함」, 제프리 유제니디스 「위대한 실험」, 리처드 포드
「사각지대」, 에드워드 P. 존스 「가게」, 줌파 라히리 「병을 옮기는 남자」, 토머스 맥구언 「카우보이」, 제임스 앨런 맥퍼슨 「닥터를 위한
솔로송」, 앨리스 먼로 「어떤 여자들」, 조이스 캐럴 오츠 「하이 론 섬」, ZZ 패커 「거위들」, J. F. 파워스 「현숙한 여인」, 애니
프루 「직업 이력」, 루이스 로빈슨 「친근한 경찰아저씨」, 제임스 설터 「이국의 해변」, 짐 셰퍼드 「마노타우로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약국」, 유도라 웰티 「외판원의 죽음」, 토바이어스 울프 「증언」, 리처드 예이츠 「패배 중독자」.
앨리스 먼로, 조이스 캐럴 오츠, 제임스 설터 외 / 강경이, 강주헌,
이재경, 하윤숙 역 / 일은 소설에 맡기고 휴가를 떠나요 (32 Stories of Work) / 홍시 / 754쪽 / 2015
(2011)
지금, 힘겨울 때,
일은 소설에 맡기고 휴가를 떠나요
이 책은 ‘일’을 테마로 한 단편소설집으로서 가치 있고 흥미롭다.
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 앨리스 먼로부터 ‘작가들의 작가’ 제임스 설터까지 세계적인 소설가 32인의 단편소설을 모았다. 소설가 리처드 포드가 Blue Collar, White Collar, No Collar 라는 제목으로 2011에 편저한 책의 번역판이다. 일 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집으로, 인생이라는 일에 뛰어든 인간에게 진정한 위로와 감동을 주는 소설 32편이 담겨있다.
또한 줌파 라히리의 「병을 옮기는 남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약국」,제임스 앨런 맥퍼슨의 「닥터를 위한 솔로 송」등을 담고 있어 작가들의 대표 작품 선집으로도 볼 수 있다.
서문 - 리처드 포드
사업 이야기 - 맥스 애플
걸리 - 러셀 뱅크스
나와 맨디블 양 - 도널드 바셀미
부당한 일 - 리처드 바우시
일하는 여자 - 앤 비티
자파토스 - 톰 코라게선 보일
(내 아버지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 조지 챔버스
사과의 세상 - 존 치버
드러먼드와 아들 - 찰스 담브로시오
작가들이 하는 일 - 니컬라스 델반코
뉴저지, 에디슨 - 주노 디아스
배달 - 안드레 더뷰스
사워크라우트 수프 - 스튜어트 다이벡
설계의 결함 - 데보라 아이젠버그
위대한 실험 - 제프리 유제니디스
사각지대 - 리처드 포드
가게 - 에드워드 P. 존스
병을 옮기는 남자 - 줌파 라히리
카우보이 - 토머스 맥구언
닥터를 위한 솔로 송 - 제임스 앨런 맥퍼슨
어떤 여자들 - 앨리스 먼로
하이 론섬 - 조이스 캐럴 오츠
거위들 - ZZ 패커
현숙한 여인 - J. F. 파워스
직업 이력 - 애니 프루
친근한 경찰아저씨 - 루이스 로빈슨
이국의 해변 - 제임스 설터
미노타우로스 - 짐 셰퍼드
약국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외판원의 죽음 - 유도라 웰티
증언 - 토바이어스 울프
패배 중독자 - 리처드 예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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