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라는 나라, 유독 서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유별난 이미지를 가진 나라다. 음악, 미술, 영화, 향수, 요리 등 각종 문화 예술 분야에서 풍부한 이미지를 갖고 있고, 그 이미지들은 대체로 고급스럽고 근사해 보인다. 하지만 그 풍요로운 이미지들 때문에 정작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자체는 가려진 건 아닐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이 나라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서양의 대중문화가 주로 영미권의 산물에 치중해 있어서 프랑스 사람들의 삶에 접근성이 더 떨어지는 것도 한 몫 한다.철학을 공부하면서 프랑스 현대철학 때문에 진절머리가 났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영미철학과 독일철학은 어려울지언정 그 논리정연한 체계를 이해하면 그 깊이 있는 메시지에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프랑스 철학은 너무나 물렁물렁해서 싫었다. 그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결론을 미리 툭 던져놓고, 그 결론과 관련 있는 모든 이야기를 다 끌어와서 대충 얼기설기 엮어논 느낌이랄까. 들뢰즈, 데리다, 라깡 등등... 그 이야기들은 가능한한 복잡하고 어려운 어휘를 사용해서 가능한한 난해하게 구성하기 때문에 도저히 다가갈 수도 없었고, 다가가기도 싫었다. 거기에 혹한 사람들이 주로 뻔한 이야기를 윽박지르듯 하는 모습에 진절머리 나기도 했고.그런만큼 한편으로는 도대체 이 나라 사람들은 평소 삶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궁금하기도 했다. 『프랑스적인 삶』, 이소설은 프랑스산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는 내용을 찾다가 우연히 어떤 프랑스에 거주 중인 한국인 유학생이 쓴 블로그 글에서 발견한 건데, 그 사람은 이 책에 대한 감상을 남기며 흔히 한국에서 유행하는 프랑스산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정작 현지에서는 별로 유행하는 것도 아니고, 그다지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프랑스 현대철학을 통해 만들어진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잘못된 것일 수 있겠다.책을 읽어보니 과연 그런 것 같다. 이 소설에서 저자는 평이한 언어로 덤덤하고 솔직하게 자기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정말로 이 책의 주인공 폴 브릭처럼 자기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라면, 그리 이해하기 까다로울 사람들도 아닐 듯 싶다.책의차례가 각 시대별 프랑스 대통령 이름으로 되어있고, 주인공의 어린 시절부터 취업과 결혼, 육아, 아들의 결혼식, 딸의 입원까지 시대순으로 평이하게 진행된다. 그렇게 평범한 삶은 아니지만, 기구하다고 할 수도 없는 삶이다.복잡하게 시간적 배경이 왔다갔다 하지 않는 만큼 어렵지 않게 읽어지는 게 좋았다. 책의 차례가 대통령 이름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소설 속 주인공들이 정치성이 강한 활동을 하지는 않는다. 일상 속에서 정치 이야기는 대화거리로 계속해서 튀어나오지만, 전반적으로 그냥 거대한 정치적 물결 속에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조금은 무력하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느낌으로 묘사되는 감이 있다.특히나 주인공이 학생운동의 물결이 격렬하게 들끓던 시기에 그냥 혈기에 차서 자기 아버지의 가게 앞에서 시위하고 물건을 집어던졌다는 내용도 그렇다. 어떤 적극적인 주체적 의지가 있었다기 보다는 그저 흐름에 휩쓸렸다는 느낌과 아버지에 대한 미묘하고 흐릿한 감정이 섞인 양 서술된다. 주인공 본인이 거기에 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주변 인물들, 조부모와 외가쪽 조부모, 어머니와 아버지, 형, 친구, 친구의 엄마, 여자친구, 아내, 장인어른, 아이들 등 주인공이 마주하게 되는 주변 인물들에 대한 덤덤한 감정 묘사가 재미있다. 정말로 덤덤하게 표현하지만, 그럼에도 솔직한 감정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할까. 예컨대 권위적인 친할머니에 비해 훨씬 인간미 있는 외할아버지가 그렇다. 주인공은 그래서 외할아버지가 정말 좋았다라고 이야기 하지 않지만, 그런 외할아버지를 회상하는 묘사방식 속에서 그런 애뜻함이 느껴진다.성에 대한 내용은 한국인으로서 낯설 수 있겠다. 그만큼 솔직했고, 도리어 프랑스인들은 그게 왜 쉬쉬해야 하는건지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주인공이 친구의 어머니에게 느낀 감정, 또 주인공의 어머니가 꿈에서 좋아하던 미테랑 대통령을 봤는데, 침대로 들어오더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 꿈 이야기에 흐뭇해하는 반응을 보이는 주인공 등등.요약하자면, 전반적으로 프랑스인들의 삶은 이해하기 어렵지도 않고, 또 그들이 자기 삶을 표현하는 방식 역시도 그다지 어렵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된 독서. 물론 분명하게 표현하긴 힘들지만 프랑스 특유의 향취도 있다. 그 향취는 좀 더 이 나라의 현대 작품들을 접해봐야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을 듯 싶다.
피레네 산맥 양치기의 손자이며, 툴루즈에서 자동차 영업소를 하는 아버지와 잡지사 교정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폴 블릭. 그는 성적 쾌락에 몰두하던 청소년기를 지나 대학을 졸업한 뒤 스포츠 지 기자가 되고 사장의 딸인 안나와 결혼한다.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를 찬양하는 아내는 욕조회사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그에게 집안 살림을 넘긴다. 자녀 양육에 전념하는 아빠가 된 폴은 그래도 비밀스러운 만큼 강렬한 연애도 짬짬이 즐기며, 유일한 취미인 사진 찍는 일에 열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나무 사진은 책으로 출간돼 공전의 히트를 친다. 그러나 아내의 사망과 경제적 파산 등 잇따른 참사는 이 프랑스 인의 삶을 비극적 색깔로 물들이는데….
프랑스적인 삶 에는 생생하고 빠르고 짧고 단속적인 글쓰기가 있고, 행간 사이에 녹아든 유머, 메스를 들이대듯이 냉소적인 아이러니가 있다. 주인공과 다른 모든 인물을 상처입힐 수 있는 것이고, 공모자인 염탐꾼으로 초대받는 독자를 열광시키는 것들이다.
카테고리 없음